목양칼럼 1 페이지


  • Rohthem Ma-D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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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118개의 글이 있습니다.
  • 118
    ‘뻥이요!’를 외치며 다시 배우는 제자도
    ‘뻥이요!’를 외치며 다시 배우는 제자도 지난 과테말라 단기선교 기간, 저희가 섬긴 한 학교는 해발 9천 피트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케살케낭고 외곽의 가난한 산동네에 자리한 곳이었지요. 사역 둘째 날, 이곳으로 다시 올라가는데 몸이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전날 밤 잠을 설친 데다, 그동안 쌓인 피로와 함께 첫날엔 느끼지 못했던 고산증 증세까지 겹쳤습니다. 머리는 지끈거리고 온몸은 무겁게 가라앉았습니다. 그날 저에게 맡겨진 일은, 아이들이 VBS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동안 먹을 뻥튀기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몸이 힘들어 손발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으니, 실제 작업의 대부분은 배 선교사님이 감당하셨고, 뻥튀기 기계를 돌리는 일은 이경희 권사님이 맡아 주셨습니다. 저는 그저 옥수수를 기계에 넣고 사카린을 뿌리는 일만 했습니다. 뻥튀기는 단순한 간식이 아니었습니다. 그 과정이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옥수수 알이 맛있는 뻥튀기로 변하려면 고온과 강한 압력을 견뎌내야 합니다. 기계 안에서 옥수수 속 수분은 갇힌 채 팽창하지 못하다가, 문이 열리는 순간 바깥으로 빠져나오며 한순간에 ‘뻥!’ 하고 터집니다. 그때 비로소 바삭하고 고소한 뻥튀기가 완성됩니다. 하지만 터지지 못한 알도 있습니다. 열과 압력으로 겉모양은 조금 찌그러지고 색도 변했지만, 끝내 자신의 형태를 고집한 옥수수는 먹을 수 없어 버려지고 맙니다. 맛있는 간식이 되기 위해서는, 옥수수의 원래 모습은 사라져야 합니다. 터져야만 뻥튀기가 됩니다. 제자도의 길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모습을 지키고, 자기 방식만 고집한다면 참된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고난과 압력 속에서도 자신을 주님께 드릴 때, 우리는 주님이 맡기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가치 있는 것은 대가 없이 얻어지지 않습니다. 탄소가 다이아몬드로 변하려면 오랜 시간 고열과 고압을 견뎌야 하고, 진주조개가 진주를 품으려면 몸속에 들어온 모래의 고통을 인내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꾼이 되기 위해서도 우리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혹시 지금, 주님을 따르는 길에서 더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잊지 마십시오. 그것은 더 아름답고 신실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빚어져 가는 과정입니다. 언젠가 주님 앞에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듣게 될 그날을 바라보며 내가 감당해야 할 댓가를 불평하지 말고 기꺼이 지불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025년 8월 17일 박일룡 목사 
    2025.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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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7
    감사는 상황의 결과가 아니라 신앙의 결정입니다
    감사는 상황의 결과가 아니라 신앙의 결정입니다 어떤 할머니가 손주에게 말했습니다.“나는 매일 감사해. 눈이 안 보이지만 귀가 들리니 감사하고, 귀가 잘 안 들리지만 아직 걸을 수 있으니 감사하지.” 이 손주는 말합니다. “할머니, 그건 불편한 걸 참고 사는 거잖아요.”그러자 할머니가 웃으며 말합니다.“얘야, 나의 기준은 ‘있는 것’이지 ‘없는 것’이 아니란다.” 감사란 결국 무엇을 바라보는가의 문제입니다. ‘마음의 셈법’을 바꾸는 것입니다.없는 것에 집중하면 불평이 생기고, 있는 것에 눈을 돌리면 감사가 나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 걸음 더 나아가라고 말합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의 가시가 제거되지 않아도 감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받은 은혜가 너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고후 12:9). 바울은 환경이 좋아서 감사한 것이 아닙니다. 환경보다 크신 하나님이 계시기에 감사한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 일이 해결되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의 감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는 신앙입니다. 감사는 상황의 결과가 아니라 신앙의 결정입니다. 지금 당신의 삶에 무엇이 없더라도, 하나님이 여전히 나의 하나님 되심을 믿는다면, 우리도 하박국처럼, 바울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결고 호락호락 하지 않은 환경이지만 억지로 끌어낸 감사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헤아려 보며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감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주님, 아직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여전히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기에, 지금도 감사드립니다.” 2025년 8월 10일 박일룡 목사
    2025.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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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6
    선교는 우리 곁에 있습니다
    선교는 우리 곁에 있습니다. 다시 해외단기선교팀을 파송합니다. 지난 여름, 교회 공동체가 마음과 힘을 모아 해외 단기자금을 마련하며 수고했습니다. 선교란 무엇일까요? 왜 우리는 선교를 해야 할까요? 성경의 첫 책인 창세기에는 죄로 인해 흩어진 인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들의 가족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 흩어진 인류(창 10:31)는, 죄의 결과로 서로 갈라지고 단절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에서는 놀라운 반전을 보여줍니다.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계 7:9)가 흰옷을 입고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양 앞에 서서 영원한 찬양을 드립니다. 성경의 처음과 끝에 반복되는 이 표현은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를 흐르는 주제이자,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방향입니다. 성경은 특정 민족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을 향해 구원의 통로로 사용하신 도구입니다. 이스라엘을 위한 열방이 아니라, 열방을 위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선교는 이 하나님의 구속 역사, 곧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흩어진 민족을 다시 모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일에 우리가 부름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아직도 ‘땅끝’은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의 오지라고 생각하며 선교를 멀리 있는 일로 여기지 않습니까? 그러나 놀랍게도, 오늘의 땅끝은 우리 곁으로 다가와 있습니다. 글로벌화된 시대 속에서, 수많은 민족과 언어를 지닌 사람들이 우리의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국이라는 특정한 문화와 언어의 경계를 넘어서 미국에 정착한 그 순간부터, 우리는 ‘열방의 중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선교는 꼭 먼 곳까지 가야 이룰 수 있는 사명이 아닙니다. 선교는 지금, 여기, 우리 곁에 있는 이웃에게로 향하는 것입니다.우리는 우리 곁에 있는 ‘열방’을 향해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있습니까?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시선과 긍휼로 대하고 있습니까? 이제는 우리의 신앙이 ‘나와 나의 교회’에만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큰 그림 안에서 다시 자리 잡아야 할 때입니다. 복음은 모아지고, 흩어지고, 다시 모아지는 하나님의 구속 이야기입니다.그 구속의 이야기 속으로 오늘도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삶의 자리에서부터 선교적 존재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2025년 8월 3일 박일룡 목사 
    2025.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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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5
    소금으로 맛을 낸 것 같은 말을 합시다
    소금으로 맛을 낸 것 같은 말을 합시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나들이를 가게 되었습니다. 한참을 걷다 피곤해진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영감, 나 좀 업어줄 수 없을까?” 할아버지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나중에 들을 소리가 겁이 나서 마지못해 업어주었습니다. 업혀 가던 할머니는 미안한 마음에 물었습니다. “나, 무겁지?” 그러자 할아버지는 투덜거리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 무겁지. 머리는 돌덩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은 부었으니까.” 돌아오는 길, 이번엔 할아버지가 다리를 삐끗했습니다. “할멈, 다리가 아파. 나 좀 업어주라.” 할머니는 갈 때 일을 떠올리며 그를 업어주었습니다. 미안한 마음이 든 할아버지는, 이번엔 말을 바꾸어 묻습니다. “나, 가볍지?” 그러자 할머니는 웃으며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럼 가볍지. 머리는 비었지, 입은 싸지, 허파엔 바람만 가득 찼으니까.”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노부부지만, 이렇게 말하면 오히려 안 도와주는 것만도 못한 상황이 되어버립니다. 저도 가끔 아내가 부탁하는 일을 다 해놓고, 정작 말 한마디로 마음에 상처를 줄 때가 있습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때로는 어떤 육체적인 도움보다 더 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말은 무엇을 말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말하느냐, 언제 말하느냐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잠언 27장 14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자기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같이 여기게 되리라.”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때를 고려하지 않으면 오히려 상대를 괴롭히는 결과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야고보 사도는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했고(약 3:2), 사도 바울도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낸 것과 같이 하라”고 권면합니다(골 4:6). 우리의 말이 소금처럼 맛을 내고, 시의적절하며, 사람을 세워주는 말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 상처를 주거나 받는 두려움 없이, 마음을 나누고 진정성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동체로 자라갈 수 있습니다. 무더운 여름, 서로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말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세워주는 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이 일은… 아무래도 제가 먼저 실천해야 할 것 같습니다.  2025년 7월 27일 박일룡 목사
    20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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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4
    구속역사의 D-day와 V-day
    구속역사의 D-day와 V-day D-Day는 군사 작전 용어로, 전략적인 공격이나 작전 개시일을 뜻합니다. 작전일까지 남은 날짜를 기준으로 하루 전은 D-1, 이틀 전은 D-2로 표현하지요. 작전 개시 당일은 D-0이기에 일반적으로 "D-Day"라고 부릅니다. 가장 잘 알려진 D-Day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있었던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입니다. 그날은 1944년 6월 6일이었습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전세가 역전되었고, 독일군의 패망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최종 승리의 날, 이른바 V-Day(Victory Day)까지는 1년 가까운 시간이 더 필요했습니다. 1945년 5월 8일, 독일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합니다. D-Day 이후 전세는 이미 연합군 쪽으로 기울었지만, 그 사이에도 수많은 치열한 전투가 있었고 많은 희생이 따랐습니다. 독일군도 전세를 되돌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역부족이었지요. 하나님의 구속 역사, 곧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해 가시는 구원의 드라마 속에도 이와 같은 D-Day와 V-Day가 있습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시고, 죽음을 이기시며 부활하셨고,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구속역사의 D-Day가 이뤄진 것입니다. 하지만 완전한 승리의 날, 곧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V-Day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그 사이에는 치열한 영적 전투가 계속될 것입니다. 이미 머리가 상한 사탄은 마지막 발악을 하며 어떻게든 교회와 성도를 무너뜨리려 공격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승리의 그날, V-Day는 반드시 옵니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며, 그의 교회를 붙들고 계십니다. 만물을 그 발아래 두시고 다스리시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 된 교회를 보호하시며 이끌어 가십니다.“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에베소서 1:22-23). 그렇기에 교회를 무너뜨릴 권세는 그 어떤 곳에도 없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싸움일지라도, 우리의 대장이신 예수님께서 앞서 싸우시며 우리를 대신해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고난과 환난이 아무리 커도, 이 세상 그 무엇도 우리를 주님의 손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주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로마서 8장 참조).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D-Day 이후를 살고 있습니다. 이미 승리가 확정된 싸움입니다. 승리의 그날, 주님 다시 오실 날을 바라보며, 오늘도 믿음으로 담대히 살아갑시다. 우리의 대장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이끄실 것입니다. 2025년 7월 20일 박일룡 목사
    2025.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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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3
    내 믿음이 연약할 때도 붙드시는 예수님
    내 믿음이 연약할 때도 붙드시는 예수님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나 “믿음이 좋아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실제로도 예수님께서 믿음이 작은 자들을 책망하셨고, 믿음 없음을 한탄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은 강해야 하고 좋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믿음이 좋다”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기준이 무엇이든 간에 믿음이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아마 대부분은 스스로 “나는 믿음이 좋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남들이 그렇게 말해 줄 수는 있겠지만, 정작 본인은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평소에는 괜찮은 줄 알았던 믿음이, 세상의 거센 풍파 앞에서는 속절없이 흔들리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럴 때면 마음이 낙심되고, “내 믿음이 이것 밖에 안 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좌절하게 됩니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두려움이 점점 더 커질 때도 있습니다. 급류에 휘말려 떠내려가는 상황을 생각해 봅니다. 그 가운데 구명줄이 내려졌습니다. 그 줄을 붙들면 살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실제로 붙잡고 버텨 보지만, 물살이 너무 거세면 끝내는 힘이 빠지고 맙니다. 그렇게 믿음을 지키고자 애쓰다가도 결국 물결에 휩쓸려가는 자신을 발견할 때, 우리는 묻게 됩니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나에게 소망이 남아 있는 걸까?’ 히브리서 기자는 “뒤로 물러가면 멸망함이라”고 말하며 돌아가지 말라고 외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했는데, 그 믿음조차 흔들릴 때 우리는 누구를 바라봐야 할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아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실 뿐 아니라 도와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히 4:15; 2:18). 삶의 고난 가운데 지치고 힘이 빠질 때, 내 믿음이 약해질 때, 예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급류 속으로 친히 들어오셔서 우리를 건져내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그분을 붙들 힘이 없을 때에도 나를 붙드시는 분이십니다. 내 믿음이 연약할 때도, 넘어질 때도, 예수님은 나를 떠나지 않으시고, 끝까지 붙잡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의 유일한, 그리고 영원한 소망—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025년 7월 13일 박일룡 목사 
    2025.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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