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칼럼 1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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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118개의 글이 있습니다.
  • 46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   영국의 정치가이며 평론가인 토마스 칼라일은 ‘프랑스혁명(1837)’, ‘영웅과 숭배(1841)등의 유명한 책을 저술한 저술가이기도 합니다. 칼라일이 수년에 걸쳐 ‘프랑스 대혁명’의 초고를 완성하고 원고를 책상 위에 두고 잠시 산책을 나간 사이에 청소를 하러 온 하녀가 쓰레기인 줄 알고 벽난로에 불쏘시개로 넣어 버렸습니다.   너무나 절망한 칼라일은 원고를 다시 쓸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절망하며 지내던 날 우연히 길을 걷다가 벽돌을 쌓아 집을 짓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벽돌을 하나하나 올려 벽을 쌓아가는 벽돌공의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다시 하나하나 쌓아가면 되겠다는 용기를 얻게 됩니다. 그렇게 일어나 그전보다 더 훌륭한 원고를 완성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길을 가다가 돌이 나타나면 약자는 그것을 걸림돌이라 말하고, 강자는 그것을 디딤돌이라고 말한다.   다윗은 그의 생애 가운데 수많은 위기를 만났고 오랜 고난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 모든 어려움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의 발을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삼하 22:34). 그 노래가 시편 18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사자나 표범 또는 곰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연약한 다리를 가진 겁이 많은 사슴과 같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슴의 다리는 가늘고 연약합니다. 그 다리를 맹수들이 공격합니다. 그러나 연약한 다리지만 그 다리로 그 앞을 막고 있는 바위를 박차고 올라가서 맹수들을 피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앞에도 우리를 낙심하게 하고, 우리의 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있습니다. 기가 막힌 웅덩이와 수렁에 빠지기도 합니다.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절망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절망의 때에도 우리가 다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발을 사슴과 같이 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여호와를 힘입어” 용기를 얻었으면 좋겠습니다(삼상 30:6).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날지라도 인내를 온전히 이루면 우리로 “온전하여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실 것입니다(약 1:4). 우리가 노래하는 것처럼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가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힘이 되시는 여호와를 의지하고 나가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고난과 시험은 걸림돌(stumbling stone)이 아니라 디딤돌(stepping stone)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2024년 3월 24일 박일룡 목사
    2024.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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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5
    발가락이라도 하나님을 닮았으면
    발가락이라도 하나님을 닮았으면   일제강점기 시절 소설가인 김동인 씨의 단편 소설 중에 “발가락이 닮았다”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화자가 친구인 M을 일인칭 시점에서 관찰하며 이야기를 전개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화자의 친구 M은 무능하고, 멍청하고, 어리석은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젊어서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매독이 걸려서 생식기능을 잃고 결혼을 합니다. 결혼 후에도 생활 능력도 없으면서 자격지심에서인지 아내를 상습적으로 구타하며 학대합니다. 그러다 아내가 자신이 임신을 했다고 말합니다. 자기 아이가 아님을 알지만 그렇게 말을 못 하고 한 번도 본적인 없는 할아버지를 닮았다고 하다가 그래도 맘이 안 놓이니까 마지막에는 발가락이 자기와 닮았다며 너스레를 떠는 모습으로 마무리됩니다. 알지만 말하지 못하고 애써 아닌 척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줍니다.   그렇게 부모는 자녀가 조금이라도 부모를 닮은 구석이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당연히 나보다는 자녀가 모든 면에서 더 뛰어나기를 바라지만 그래도 그 자녀가 내 아이란 증거가 있기를 바랍니다. 유전적으로 자녀는 부모를 닮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모습을 찾으며 우리는 자녀들과 교감을 하게 되고, 그 자녀가 내 아이란 사실에 기뻐합니다. 닮은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당신의 자녀가 당신을 닮기를 바라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라고 하셨습니다(레 11:44; 19:2). 베드로도 순종하는 자녀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아가라고 권면합니다(벧전 1:15-16).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드셨습니다(창 1:26). 그의 자녀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았음을 보고 기뻐하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자녀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되어 있음을 슬퍼하시며 다시 그 형상을 회복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신 것입니다(롬 8:29).   우리가 자녀를 보며 우리를 닮은 구석이 있음에 기뻐하고 감격해하듯 하나님도 그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성품, 예수님의 성품을 닮은 모습에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하실 것입니다. “역시 내 아들, 내 딸이다”라고 하시며 말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하는 가장 본질적인 방법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의 성품,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성품을 더 닮아가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닮은 모습이 제대로 없어 찾다가 찾다가 발가락이 닮았다고 하시는 ‘웃픈’ 현실이 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우리도 발가락이 하나님과 닮았다고 우기는 성도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임을 말하지 않아도 남들이 보고 분명하게 알게 되도록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2024년 3월 17일 박일룡 목사
    2024.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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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4
    끝까지 믿음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끝까지 믿음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2차 대전이 한참인 1941년에 윈스턴 처칠은 자신의 모교인 헤로우 학교의 졸업식 연사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는 졸업생들에게 지난 10개월 동안 영국군이 당한 어려움을 말했습니다. 누구도 영국의 승리를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배운 것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어떤 것에도 말입니다. 위대한 일이든 하찮은 일이든,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바른 정신으로, 명예로운 일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면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이 연설은 전쟁의 피해로 낙심한 낙심한 영국인들에게 용기와 소망을 준 메세지로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는 내용입니다.   18세기 프랑스의 육군 사관학교에서 한 교관이 생도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두 나라 군사가 비슷한 병력과 지형 조건에서 서로 싸우고 있다면 누가 이길 것인가? 그때 한 생도는 아침에 밥을 많이 먹고 나간 편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생도는 신발 끈을 더 튼튼하게 묶고 나간 편이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한 생도가 말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최후의 5분까지 있는 힘을 다해서 싸우는 편이 이길 것입니다.” 그렇다고 교관이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생도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생도는 씩씩하게 대답했습니다. “프랑스 육군 사관 생도 나폴레옹입니다.”   우리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현실이 너무 힘들기 때문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노력했지만 별로 성과가 없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도 현재로서는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지치고 힘이 들어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이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 약속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믿음으로 포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의 백성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포기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고 말합니다(롬 4:18).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십시오. 지금 내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막 10:30).   2024년 3월 10일 박일룡 목사
    2024.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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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3
    당신은 교인입니까 제자입니까?
    당신은 교인입니까 제자입니까?   “당신은 신자입니까 아니면 제자입니까?”   누군가 이렇게 질문을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사도행전을 보면 신자란 말과 제자란 말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라고 부르셨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들을 “제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사 그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눅 6:13).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120명의 성도들을 “제자들”이라고 말하고(행 1:12) 신자들이 늘자 “제자들이 더 많아졌다”라고 표현합니다(행 6:1).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행 11:26). 예수님의 대사명도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세례를 베풀라”는 것입니다(마 28:19). 세례를 베풀고 나중에 제자로 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그를 우리 인생의 주인과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이제 내 삶을 그분에게 드리고 그분의 도제(제자)가 되어서 그분을 따르는 삶으로 헌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처음부터 예수님에 대해서 다 알고 예수님처럼 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제자는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과 함께 있고 예수님께 계속해서 배우는 사람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과 당신의 권위(능력)를 주셨습니다.   달라스 윌라드 목사는 <잊혀진 제자도>에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그의 피에만 관심이 있는 그리스도인들로 교회가 넘쳐난다. 나는 그들을 '뱀파이어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라고 합니다. 도전적인 표현이지만 우리의 잘못된 개념을 통렬히 지적해 주는 표현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스승을 따르는 도제들은 수습기간을 지나면 스스로 선생이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은 끝까지 그의 제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사는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삶의 마지막까지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를 따라 사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신자가 제자입니다. 제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은 서로 나눌 수 없는 동의어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그의 제자입니다. 그리고 제자로 살아야 하는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지금 당신은 예수님의 제자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교인으로 살고 계십니까?   2024년 3월 3일 박일룡 목사
    2024.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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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2
    예수님이 나의 목자이시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목자이시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필립 켈러의 ‘양과 목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인 켈러는 동아프리카에서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본토박이 목자들 틈에서 자라났다고 합니다. 후에 토론토 대학교에서 농업 토양학자로 훈련을 쌓은 후에 캐나다의 브리티시컬럼비아에서 농학 연구와 토양관리 목장 개발을 위해서 여러 해 일했습니다. 후에는 동아프리카에서 생태학 연구에 전념하며 신문에 기고도 하고 저술도 한 농학자이며 저술가였습니다. 이 책은 그가 직접 양 때를 키우면서 경험한 내용을 근거로 시편 23편을 해석해 놓은 책입니다. 출판된 지 5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책입니다.   “양과 목자”란 책에서 필립 켈러는 시편 23편을 이렇게 다시 자기 말로 표현했습니다.   나는 내 길만 고집했습니다. 그 끝이 낭떠러지일지라도...   나는 눈에 보이는 대로 먹었습니다. 그것이 독풀일지라도...   나는 당장의 목마름만 채웠습니다. 그 물이 썩은 구정물일지라도...   나는 높은 자리만 탐합니다. 동료를 들이받고서라도...   나는 자꾸 울타리 밖을 꿈꿉니다. 내 한 몸 지킬 힘도 없으면서...   이런 나를 그분은 돌보십니다.지팡이와 막대기로 바른 길로 이끄시고, 신선한 꼴과 시원한 물로 채워 주십니다.그리고, 세상의 악한 것 들로부터밤에도 낮에도 쉬지 않고 보호해 주십니다.   이것이 여전히 나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하며 그런 나를 품에 안고 돌보시는 선한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니 감사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목자이시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2024년 2월 25일 박일룡 목사
    2024.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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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금맥을 찾은 미국 서부개척시대의 광부들은 ‘유래카’(Eureka)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유래카는 “내가 발견했다, 찾았다”라는 의미의 그리스어입니다. 알다시피 미국인들이 그리스어로 이렇게 소리친 배경에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수학자, 천문학자, 물리학자였던 아르키메데스에 얽힌 유명한 일화 때문입니다.   아르키메데스는 왕의 부탁으로 순금 왕관에 불순물이 첨가된 것인지 알기 위해서 몇 일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문제가 풀리지 않자 목욕탕에 앉아서도 고민을 계속했습니다. 그 때 자신의 몸이 욕탕에 들어가면서 물이 넘치는 것을 보고 부피의 차이를 계산해 보면 불순물이 첨가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얻게 됩니다. 불순물이 첨가되면 물체의 밀도가 달라지게 되고 그러면 부피의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묘안이 떠오르자 그는 너무 기뻐서 벗은 몸으로 거리로 달려 나와 ‘유레카’를 외쳤다는 데서 기인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 했을 때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가 되었습니다.   산삼을 캐던 우리 선조들은 산삼을 발견하게 되면 산이 떠나도록 “심봤다”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기쁨의 소리이며, 감사의 외침이며, 또한 동료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소리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비밀스러움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감추인 보화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는 우리가 모두 눈으로 그 영광을 보게 되겠지만 지금은 아는 자만 알고, 보는 자만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보화를 발견은 사람은 자신의 모든 재물을 다 팔아서 살 정도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13:44).   그런데 문제는 지금 우리 눈으로 그 가치를 다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 같은 우리 몸에 가졌다고 말합니다(고후 4:7). 이것이 얼마나 큰 가치와 능력이 있는지 아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의 눈으로 보이는 것은 오직 약하고 낡아져 가고 있는 우리의 육체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 보배의 가치를 알 수 있을까요? 바울은 이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라고 설명합니다(6절).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우리의 영원한 하늘 집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히 12:2).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히 3:1).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들어갈 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24년 2월 18일 박일룡 목사  
    2024.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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